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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9 도쿄여행 3일차 1부 - 여행의 최종 목표, M3 본문

여행/2023.10 도쿄여행

2023.10.29 도쿄여행 3일차 1부 - 여행의 최종 목표, M3

inkypen 2024. 6. 1. 21:15
아침엔 잠시 비가 왔지만, 행사 시간이 다가오자 하늘이 맑아졌다.

사실 이 글을 시작하는데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고작해야 여행기일 뿐인데, 그 중 하루의 반나절에 대한 이야기일 뿐인데. 그런데도 써야지 써야지 생각만 하다가  2일차 여행기를 쓴지 무려 반년 가까이 지나버린건, 단순히 게을렀다고 자책만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좋았던 경험은 감히 글로 담아내는 데도 이토록 큰 결심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자칫 그 좋음을 내 손으로 망칠 것 같은 두려움. 그럼에도 반드시 기록해두고 싶었던 경험이기에 지금이라도 적어본다.
 
나에게 있어서도, 동행한 애인님에게 있어서도 M3 이벤트 현장에 직접 방문한다는 건 엄청나게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둘 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동인음악을 들어왔고, 많이 듣는걸 넘어 그 안에서 가장 취향인 음악, 앨범, 아티스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려온 사람들이었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 일상속에서 숨쉬며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그 음악을 만드는 아티스트들을 같은 공간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의 과장도 안보태고 기적과도 같았다.

동인음악을 사랑하는 오타쿠 커플 둘이서 나란히 나란히

이른 아침에 숙소에서 나올 때는 비가 조금씩 후둑후둑 떨어지던 중이었다. M3 행사는 도쿄류쓰센터 실내에서 진행하니 돌아다니는 데 큰 문제는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날씨가 계속 궂으면 어떡하나 잠시 걱정했다. 다행히도 도쿄 모노레일 하네다 공항선을 타고 행사장에 도착한 뒤, 실외에서 줄을 서 행사 시작을 대기하고 있는 동안 서서히 먹구름이 걷히고 눈부시게 맑은 하늘이 고개를 내밀어 주었다. 나는 존경하는 아티스트분들께 드릴 선물인 약과와 편지가 담긴 봉투를 연신 매만지면서 혹여라도 놓칠새라 꼭 쥐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일반 입장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되자 갑자기  굳게 닫혀있던 행사장 외벽쪽 문이 환하게 열리면서, 안에서 부스를 준비하고 대기하는 수많은 아티스트분들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는데... 이때 느꼈던 벅참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해야 할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비로소 입장시간이 되자 아티스트들과 방문객들이 모두 함께 개막을 축하하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같은 것을 사람들이 모인 현장에서 한마음으로 내는 소리는 늘 고양감이 넘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같이 한마음이 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M3에서 구매했던 음반이 약 26,000엔 어치였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행사장에 입장하고 난 뒤에는 인파도 많았을 뿐더러 무엇보다 정말 정신없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때 느꼈던 감상을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는게 좋을까 고심 끝에, 당시 이벤트장에서 직접 입수한 음반들을 하나씩 되새겨 보는 형식으로 결정했다.

Diverse System - AD:Progressive House 4 & AD:TECHNO 7

동인음악을 조금이라도 직접 찾아서 들어본 사람이라면 Diverse System을 모를 수는 없다. 그런 인지도을 갖춘 레이블인 만큼 부스 위치가 벽부스에 할당되어 있었고, 나중에 들르면 분명 정신 없으리라 예상했기에 가장 먼저 방문후 그 뒤를 돌기로 했다.  프로그레시브 하우스는 워낙 좋아하는 음악 장르기도 할 뿐더러, MAYA AKAI 님과 (뒤에 기술할) 레이블 Embers Melody 컴필레이션에 주로 참여하는 분들이 신보에 많이 참여해 구매했다. 테크노는 그렇게 자주 듣는 장르는 아니지만 자켓이 매우 멋지게 나와 감탄했고 입수해서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어서 같이 구매하였다.

ZPPTRAX - partial recall : reinforced

PINKPONG님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는 레이블 ZPPTRAX의 앨범으로, 이전 전작인 partial recall을 인상깊게 들었기 때문에 후속작 구매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부제인 reinforced가 암시하듯 전작보다 하드해진 음악이지만, 음압을 세게 눌렀다기 보다는 깊은 무게감과 역동성에 방점을 둔 느낌이다. 참여 아티스트 라인업이 출중한 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들이 어떻게 더 폭넓은 음악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을지 기대하도록 만드는 부분이 partial recall 시리즈의 진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kidlit - Camera obscura/Exposure

kidlit님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음악' 을 만드는 분이라고 줄곧 생각하는 아티스트분이었다. 상냥함과 다정함이 오롯이 담긴 풍경을 섬세한 음악으로 그려내는 분이었기에 이번 M3에 참가한다고 하셨을 때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1주일 전에도 신보 소식을 접하지 못했기에 굿즈라도 사는 마음으로 들르려고 했으나, 행사 이틀 전에 신보 소식이 발표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숙소에서 혼자 크로스페이드를 들으며 괴성을 지르던 나의 모습을 애인님이 못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현장에서 긴장한 목소리로 인사를 드리며 신보 한장, 애인님 선물용으로 (나는 이미 갖고있는) Close to you 한장을 구매했다. "팬이에요" 하는 소심한 고백과 함께 선물과 편지가 담긴 봉투를 건네드리며 후다닥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Lavana Travelers - SEE YOU AGAIN

게임 크로스비츠를 좋아하는 한 팬이 기획해 일종의 트리뷰트 형식으로 제작한, 게임 크로스비츠에 애정과 추억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리스펙트 같은 음반이다. 2일차 여행기에서도 적었지만 나는 크로스비츠가 현행가동 하던 때는 플레이 해본 적이 없었으나 애인님이 크로스비츠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여러 다양한 멋진 수록곡들을 소개받았었다. 그래서 이 앨범의 발매 소식에도 기뻐하며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직접 들어보니 훌륭한 아티스트 라인업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음에도 기존 게임 수록곡과 너무 비슷한 느낌의 트랙이 많았다. 아무리 트리뷰트라 하더라도 이 앨범만의 고유한 개성을 갖추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그래도 살 때는 전혀 후회 없었으니 됐나.

Lostalgic Recordings & Embers Melody - Flora

아하는 동인음악 아티스트는 정말 많지만, 레이블 단위로서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꼽자면 역시 Embers Melody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같다. 프로그레시브 하우스가 뭔지도 몰랐던 나에게 멜로딕 프로그레시브 하우스라는 음악 장르의 신세계를 보여준 굉장한 레이블이다. 무엇보다 정말 꾸준하게 이 음악 장르의 신보를 발매해 나가고 있는 점이 리스펙트할 만하다고 생각하다. 이때는 Lostalgic Recordings 레이블과 콜라보레이션 형태로 앨범을 발매했고, 기존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차분하고 서정적인 기조에 역동성과 신선함이 부여되어 인상깊었다.

Conures - イントロダクション オブ 和製ハウス vol.7

하우스 장르 컴필레이션을 꾸준히 내고 있는 Conures님의 앨범이다. 제목부터 비교적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시피 일본 서브컬처 / 언더그라운드를 지향하는 댄스 뮤직 음반 시리즈인데, 하우스 장르지만 상쾌하다기 보다는 묵직한 쪽에 가까운 인스트 음색에 보컬로이드나 서브컬처향 보컬 샘플링을 적극 도입해 고유의 유니크한 분위기를 낸다. 이 앨범 시리즈는 중고 매물이 정말 없는 편이라서 이번 기회가 아니면 못 구할것 같았고, vol.7은 나의 최애 아티스트인 effe님이 리믹스한 트랙이 1번부터 들어가 있었기에 바로 구매하였다.

Seiji Takahashi - str011 soar & str012 снег

이지 타카하시님은 애인님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 아티스트 두 분 중 한 분이다. 애인님은 세이지님이 발매한 모든 앨범을 소장하고 있는 진짜배기 팬이었고, 직접 세이지님께 이메일을 발송해 모든 앨범을 구매한 비범한 덕질 내력이 있는지라 세이지님이 애인님을 알아본 것은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그런데 나를 향해 "잉키펜씨 맞나요?' 했을 때는 정말... 놀랐다. 앨범은 str011 soar과 str012 снег, 이렇게 총 두장을 구매했는데, "밴드캠프에서도 구매하지 않으셨던가요?" 라는 말을 들은건 M3 회장에서 경험한 가장 놀랐던 순간이었다. 실제로 밴드캠프에서 str012 снег를 디지털로 구매하긴 했지만 그걸 기억하고 말씀을 건네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이지 타카하시님은 정말 그분의 음악을 꼭 닮아서, 차분하지만 무척이나 상냥한 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Voile - praeteritum

Voile님은 세이지 타카하시님과 공동으로 부스를 내신 아티스트분이다. 이전에는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다 지금은 앰비언트 / 드론 / 일렉트로니카 장르 위주의 앨범을 발매 중이시고, 관련 이벤트에서 DJ 활동도 하고 계신다. 앰비언트 음악을 만드는 분들은 주로 자신의 의견을 차분하게 조곤조곤 말하는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Voile님도 그런 점잖으면서도 멋진 분이라서 서로 결이 맞는 아티스트들이 힘을 합해 이런 부스를 내는건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선물과 편지를 전해드리면서 응원의 마음을 담아 보냈다. 이분의 음악이 어떤 정서를 표현해나갈지 궁금했기에 이 앨범을 구매했다.

aon - 灯台守の休日

aon님은 세이지 타카하시님의 곡 ' 雪の果 '의 보컬을 담당한 분으로서 처음 알게 되었다. 큰 기복없이 담담하게 노래하는 목소리 속에서도 상냥한 아름다움을 느꼈는데, 직접 작곡하신 인스트루멘털 앨범에서도 마음을 따뜻한 어루만지는 것 같은 부드러움을 한가득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aon님께도 선물과 편지를 전해드리며 "팬이에요" 라고 전해드렸는데, 진심으로 너무나 기뻐하시는 반응이여서 마음이 뿌듯함으로 가득 찼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음에 뵈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앨범 디스크에 사인해주세요!" 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fusz - Reconstruqt

Bunkai-kei Record에서 활약했던 아티스트분들이 다시금 컴필레이션에 참여하는 형태인, fusz 레이블의 앨범 중 하나이다. 나는 lost in thought과 phos만 가지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애인님이 이 Reconstruqt를 선물로 사주었다. 이 때 부스에서 Phasma 님이 나서서 앨범을 판매하고 계셨는데, 애인님이 앨범을 구매하면서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한다" 는 말을 드렸다. 역시 M3는 단순히 음반을 사고 파는 차원을 넘어, 아티스트와 팬 사이에 소통과 격려의 창구가 된다는 점이 정말 매력적이다.

Sana@Togo - エイエンノカケラ

BEMANI 음악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Togo님과 Sana님이 독립된 형태로 음악 활동을 하신다는 소식은 반갑기도 하고 어떻게 전개되어갈지 궁금하기도 했다. 다만 이 앨범은 올드한 느낌이 너무 강해서 좀 아쉬웠다. 음악 자체는 편안하게 듣기 좋지만, 독립된 아티스트 일환으로서 2023년에 발매한 음악이 약 20년전 BEMANI 앨범 참여곡을 들을 때의 느낌과 변한게 거의 없다는건 팬으로서는 아쉬운 점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지만 역량있는 아티스트들인 만큼 앞으로 해나갈 음악 활동에 점차 더 긍정적인 변화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

mamima@su - 進化録

작곡가 m@sumi님과 보컬 mami님은 따로 활동할 때도 각자만의 개성이 강하지만, 함께 그룹으로서 활약할 때 빚어지는 독특한 세계관과 카리스마가 있다. 거기에 많은 매력을 느꼈기에 부스에 방문할 때 선물과 편지를 전달해 음악을 애정하는 마음을 같이 담아드렸다. 이 앨범은 전작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사후세계 세계관의 연장선을 그리되, 불교 내지 윤회 모티프의 색채가 더 강해진 점이 눈에 띄인다. 수록곡 중 영어 제목 트랙에 일렉기타가 들어간 점도 신선해서 좋았고, 그러면서 동시에 기존부터 이어져 온 몽환적인 색채를 견지하는 점이 인상깊었다. 언젠가 정규 2집도 발매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Goldfish - 7:sette

당시에 거의 새롭게 접했던 아티스트의 음반 중 가장 좋았던 앨범이다.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를 주제로 고혹적인 재즈 멜로디와 오케스트라 연주, 그리고 짙고 풍부한 음색의 보컬이 정말 멋지게 어우러졌다. 첫트랙부터 막트랙까지  짜임새가 훌륭하고, 애절한 마음과 세상의 잔혹함, 그럼에도 소망이 담긴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메세지까지 느껴졌다. 타워레코드처럼 상업 차원의 음반매장에 놓여있어도 전혀 꿀림이 없는 빼어난 퀄리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Goldfish 레이블의 음악 활동은 계속 주시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Sennzai - REPELACHE

Sennzai님의 보컬은 표현하는 폭이 넓어서 어떤 장르에도 잘 어울리지만, 개인적으로는 WHITEFISTS - Shadow Call에서 느꼈던 파워풀함이 유독 기억에 크게 남아있었다. 같은 아티스트가 작곡한 트랙이 이 센자이님 신보에도 수록되어 있어 구매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와중에 애인님이 선뜻 선물로 사주어서 기쁜 마음으로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이 간판, 풍경, 현장감이 눈앞에 선하다.

글을 마치면서 뭔가 좀 더 교훈적이고 그럴듯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여기까지 오는데도 에너지를 벌써 많이 소진해 버렸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내가 M3에서 느꼈던 생각과 감상을 소중하게 꾹꾹 담아 작성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즐거운 경험을 M3가 아닌 다른 어디에서 할 수 있을까? 일단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고, 소중한 사람과 이런 시간과 공간을 누릴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정말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고 지금 생각해도 한점의 후회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M3에서의 일정을 마치고는 숙소로 돌아가 짐을 놓고 휴식을 취했는데, 이후 이야기는 2부에서 마저 작성하려고 한다.
 
- 3일차 2부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