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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정원
사람은 누구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는 순간이 있습니다. 가령, 어린 시절 닳도록 읽었던 그림책을 집안 구석에서 발견했을 때라던가요. ”이게 아직도 있었네?“ 라는 놀라움과 함께 케케묵은 먼지가 앉은 표지를 손으로 쓸어내리고, 책장을 펼치면 동화 속 세상을 담아낸 색색의 그림들이 행진곡처럼 이어집니다. 화려하고 알록달록해서 좋아했던 삽화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색이 바랬고, 언젠가 꼭 가고 싶었던 동화 세상은 이제서야 다시 머리속에 어렴풋하게 떠오르기 시작하며, 소중했던 책은 표지와 책등은 낡고 해져서 우둘투둘 튀어나온 종이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Dormir(돌미르)는 작곡가 TOMOSUKE(토모스케)님과 보컬 Crimm(크리무)님으로 구성된 음악 유닛으로, 팝픈뮤직이나 기타도라 등 BEMA..
입문작이라는 개념은 기준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애니 입문작이 무엇인가요?" 하는 질문의 경우, '만화영화' 라면 투니버스에서 방영했던 「꼬마마법사 레미」 일 수도 있고, '인터넷에서 덕질했던 애니' 라면 플래시 애니 「나이트메어 시티」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보통 '일본 애니' 라고 칭하는 '12화 단위의 TV 방영 애니 시리즈' 라면 「데스노트」라고 대답할 것입니다.이처럼 입문작의 개념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저에게 "동인음악 입문작이 무엇인가요?" 하고 질문하면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중학생 때 무료 음악게임 「Dancing Onigiri」를 플레이하기 시작한 때부터 Cranky님이나 OSTER PROJECT님의 음악을 알게 되었고, Rayark사의 음악게임 「..
「Lump Sugar Suite」 는 타치논(Haruka Toki)님이 주축이 되는 동인 그룹 Cirtus and Ocean Colour(약칭 시오카라)가 시부야케이 컨셉으로 발매한 동인 앨범입니다. 타치논님이 믹싱과 마스터링을, TEA님이 보컬을 담당했고, 시부야케이라는 장르의 특색은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분위기의 개성을 덧입힌 곡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여 게스트진도 페노레리, 레드글래시즈 등 팝 장르의 곡을 잘 쓰는 아티스트를 초빙했기에 트랙 수가 많지는 않지만 알찬 내실을 갖춘 앨범입니다.보컬 TEA님의 목소리는 무척 맑아서, 마치 투명하게 바닥이 비쳐보이는 물같은 음색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이분의 목소리는 전자음이 통통튀는 EDM 장르에도 잘 어울리지만, 개인적으로는 드럼이나 기..
삶에 있어 소중했던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면, 무언가 거창한 성과를 냈을 때 보다는 평범한 일상 속 장면이 더 많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시험에 합격하거나 업무에서 큰 성과를 냈을 때의 짜릿함도 좋지만, 별다른 굴곡 없는 하루 속의 잔잔함에 그저 시간을 둥실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일상이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나' 의 곁에서 함께 시간을 나누는 소중한 '너'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추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이처럼 '나' 와 '너' 가 '우리' 로서 함께하는 순간을 포착한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애프터 썬' 에서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의 모습을 캠코더로 촬영하는데, 이 모습이 유독 '순간을 간직한다' 는 메타포로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저는 음악을 통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을 좋아합니다. 여기서 음악을 통한 체험이란 청각적인 체험은 물론이고, 음반의 모양새나 쥐는 감촉을 느끼는 시각적, 촉각적 경험 등을 포함해 여러가지 감각과 정서 등이 융합되어 느낄 수 있는 모든 경험을 총칭합니다. 이렇듯 음악은 본디 우리가 무언가를 겪고 느끼는 행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예술장르이지만 유독 그러한 점을 크게 느끼는 작품이 있는데, Cicada의 음악이야말로 체험이라는 양상을 잘 드러내는 예시라고 생각합니다.Cicada는 인디 음악 레이블 FLAU에 소속된 대만 출신의 아티스트 그룹입니다. Cicada라는 그룹명은 ‘매미’ 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매미를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소리를 통해 존재를 알게 되기 때문에 붙인 명의라고 합니다. 어쿠스틱한 ..
소중한 작품은 그 작품의 내용 뿐만 아니라, 작품의 물성까지 특별합니다. 소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에서 어떤 책은 적힌 내용 뿐만 아니라 책 자체에 특별한 인연이 깃든다고 말한 것처럼, 저는 음반에도 그러한 마법이 있다고 믿습니다. 원래부터 실물 음반을 선호하지만 특히 백예린님의 「선물」 앨범은 물성에 대한 애정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는데, 그 이유는 이 「선물」 이 제가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음반이기 때문입니다.「선물」 은 가수 백예린님이 한국 대중가요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불러 수록한 커버 앨범입니다. 개인적으로 백예린님의 정규 앨범도 좋아해 소장해서 듣고 있지만, 유독 이 「선물」 은 더욱 자주 꺼내고 거듭 마음에 새기고 싶어집니다. 담백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다시 새롭게 불린..
동인음악 레이블 Diverse System은 다양한 컨셉을 갖고 컴필레이션 음반을 프로듀스하고 있습니다. 특정 음악 장르, 고참 아티스트 리스펙트 등 주제는 다양하지만 특히 개성 있는 테마를 잡고 제작하는 시리즈가 여럿 있습니다. 그중 주목할 만한 하나가 fig.시리즈입니다.fig. 시리즈는 디자이너가 제시한 디자인과 부제만 가지고 참여 아티스트들이 수록곡을 제작하는 시리즈이며, 현재 총 다섯 개의 작품이 발매되어 있습니다. 그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네 번째인 「fig.4 -Adolescence-」입니다. 단순히 fig. 시리즈 뿐만 아니라 Diverse System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중 단연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만큼 강한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부제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이 음..
당신 앞에 목재 오르골이 놓여있습니다. 오르골을 손에 쥐어봅니다. 나뭇결의 방향이 피부로 느껴지고 콧가에는 그윽한 나무향이 풍깁니다. 태엽을 감아봅니다. 맑고 오밀조밀한 선율의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분명 고운 음색이지만 자세히 귀를 기울이다 보면 당신은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는 꽃봉오리가 시들어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죽은 사람의 백골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彼岸譚(피안담)」 은 BEMANI에서 입지를 단단히 굳힌 두 아티스트 m@sumi님과 mami님의 합작 명의로 발매된 음반입니다. 어느 합작 명의나 마찬가지지만, 작곡가과 보컬리스트의 듀오는 단순히 따로 활동할 때의 특징만 합친 것 그 이상의 시너지를 보여줄 때 진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mami & m@s..
예술 작품의 제목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목을 끌기 위해 제목을 붙일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작품의 전반에 흐르는 주제의식을 요약해서 표현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앨범 「Papillon」는 제목이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큰 작품입니다.Papillon(나비)는 상징의 단어로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나비가 함축한 의미가 현상의 ‘원인’, ‘과정’, ‘결과’ 이렇게 크게 세가지 관념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며, 이는 「Papillon」이 담고 있는 음악을 해석하는 데도 적용됩니다. 전자음악은 세상을 바꾸는 원인이 되기도, 거쳐가는 과정이 되기도 하며 결국에는 도달하는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나비 효과’ 라는 용어는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커다란 폭풍이 되는 것처럼 겉보..